내게 붙은 별명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에 하나가 ‘일중독’이라는 것이다. 중독은 아무리 좋은 것에 중독되었다고 해도 안 좋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약도 과하면 독이 된다지 않는가.
주위에 날 걱정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하는 얘기는 “형. 일 좀 줄여.”라는 것이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일을 줄여야 한다. 요즘은 나도 한, 두 가지 일에 집중하고 싶다. 한, 두 가지 일에 집중한다면 나도 일을 잘 할 수 있고, 누군가 얘기하듯이 치고 빠지기 식으로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치고 빠진다는 얘기는 무책임하다는 말이다. 누군들 무책임하다는 말을 듣고 싶겠는가.
이번 주는 최악의 일정들로 일정표가 빽빽하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서로 다른 주제의 회의와 토론회, 교육 일정, 거기에 술자리 약속까지 어디 몸이라도 아플 틈이 없다. 매번의 회의와 토론회, 교육이 준비 없이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토론문을 쓰고, 회의 문건을 준비해야 한다. 이렇게 정신없는 일정으로 살라면 내 몸이 강철이라도 부서지고 말겠다, 이러다 40대에 찾아오는 과로사, 돌연사가 나만 피해 가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죽는 게 겁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죽으니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죽어야 남아서 활동할 사람들에게 덜 미안할 것 같은데…. 그래도 이번 주 말에는 제주도에 2박3일의 학술회의가 잡혀 있다. 내 돈 들이지 않고 제주도로 날아가 심포지엄을 하는 것이다. 맘에 드는 것은 일정이 빡빡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호텔에, 바닷가 근처라는 것이다(예전에 서귀포 근처 오름에 올라가 농사지을 땅을 봐 놨는데, 이번에 확인할 수 있을까?).
그래서 9월에는 이런저런 일정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안식월에 들어가려고 한다. 물론 일정들을 모두 젖힐 수는 없지만, 매일 출근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라도 벗어나는 것이 주는 안식의 맛을 느끼고 싶고, 어딘가 깊은 산에 혼자 가서 절대 고독의 순간도 맛보고 싶다. 그만큼 난 일에 지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일에 치여 사는 난 올해 기어이 또 일을 하나 또 벌렸다. 월간 <사람>이다. 지난해 말 인권운동을 지원하겠다는 뜻으로 몇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다산인권재단. 거기서 월간지를 만들기로 했고, 그 월간지의 편집인을 맡고 만 것이다. 솔직히 그 월간지라는 게 시사주간지인 <한겨레21>보다도 얇은 것이고, 한 달에 한 번 만드는 것이니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편집인을 맡았지만, 이게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왜 이럴 줄 몰랐겠는가. 매월 중순이면 어김없이 마감시간에 쫓겨 원고 쓰고, 원고 검토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낮 시간에는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으니 밤 시간에 내 원고 쓰랴, 남의 원고 검토하고 작업 지시하랴 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다.
그때마다 후회를 하곤 한다. 이걸 왜 한다고 했지? 누구 잡으려고 이걸 하나, 하루에 열 번도 더 후회를 한다. 그렇지만 이왕 저지른 일, 피해 갈 수는 없다. 부딪히는 수밖에. 길이 없으면 맨몸으로 부딪히는 것 밖에 없다. 이게 몸뚱이로 사는 놈이 생활력이다. 그러면 무슨 수가 생긴다.
그렇게 이번에 3호를 냈다. 창간호보다 2호가 좋아졌고, 3호가 더 나아진 것 같다. 이제 조금씩 감이 생긴다.
엄살을 좀 부렸지만, 언제고 바쁜 일정 속에 살면서도 하고 싶었던 일 중에 하나가 인권 전문 잡지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평소의 소망을 지금 난 이루어가는 중이다. 인권운동이 30년의 역사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을 꿰어주는 그런 매체 하나 없다는 것이 갖는 아쉬움이 있었다. 운동을 정리하고, 운동 내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반영하고, 또 운동진영에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하는 그런 소통의 공간으로서의 매체가 없다는 것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들이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운동 상황과 늘 같이 가는 그런 매체를 꿈꾸어 왔었다. 인권운동의 현장을 발로 뛰는 활동가의 고민과 문제의식,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그런 글들로 채워지는 잡지를 만들고 싶다.
<사람>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아직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다. 이제 홈페이지도 만들고, 거기에 웹진도 제공하려고 하지만, 인권 활동가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람>을 그리 생각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건 일 중독자인 난 또 무모한 일을 벌였고, 후회를 하면서도 일 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문제는 구독자를 늘리는 일인데, 광고할 돈도 없는 가난한 재단의 살림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활동가들에게 인정받고 입소문으로 독자들이 늘어날 수 있다면 무엇보다 행복하겠다. 내가 저지른 이 일이 나의 무모함으로만 남지 않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3호가 나왔으니 이제 다시 4호를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는 제발 원고 청탁이 쉽게 되었으면 좋겠고, 마감 시간을 지켰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힘 좀 덜 들이고 원고를 썼으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 하나 품어 본다. 그럼 당분간은 일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을 것 같다(이제 그만 써야겠다. 가장 오랜 친근한 벗인 ‘잠’의 유혹을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겠다. 일단 자야겠다). 어느덧 새벽 3시. 쌓인 일들을 미루고 난 짧지만 깊은 잠에 취해 들어간다. 오늘의 일정도 24시간보다 연장되었다. 피곤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