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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그 섬에 다녀오다

동거차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의 작은 섬. 백제시대 제주를 다니는 선박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 ‘거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남서쪽 맹골군도와 거차군도 사이가, 조류가 빠르기로 유명하다는 맹골수도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동거차도의 남쪽 병풍도의 북쪽 해역에서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았더라면 이름을 모른들 이상하지 않을 섬, 그 섬에 다녀왔다.

 

세월호 인양 가족 감시단

2015년 9월 1일, ‘세월호 인양 가족 감시단’이 발족했다. 천막을 세운 동거차도는 땅에 발을 딛고 세월호 인양 작업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직선 거리로는 1.6킬로미터가 되는 곳에 엉거주춤 서 있는 크레인선을 보기 위해 망원렌즈도 설치했다. ‘세월호 인양 가족감시단’이 더욱 가까운 곳에서 인양 작업을 모니터링할 방법도 있었다. 416가족협의회는 해양수산부에 현장 크레인선과 바지선 동승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가파른 숲길을 지나 휑한 산마루에 천막을 쳐야 했던 이유다.

2014년 미수습자 수색을 종료시킬 때는 바로 인양을 할 것처럼 굴었던 정부는 해가 바뀌어도 아무런 계획을 내놓지 않았다. 1주기가 되던 날 박근혜는 팽목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조속한 인양’을 약속했다. 그러나 유가족을 배제한 채 인양 계획에 대한 정보 제공도 의견 수렴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인양을 하려는 것인지 말려는 것인지, 증거를 찾으려는 것인지 숨기려는 것인지, 선체를 보존하려는 것인지 부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을 겪어낸 곳이 동거차도였다. 그곳에서 가족들은 일주일씩 교대하며 매일 일지를 작성하고 24시간 인양과정을 지켜보았다.

동거차도에 감시 캠프가 만들어지고 다시 한 해가 흐른 즈음 광화문 광장에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근혜의 권력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조속한 인양’이 시작되었다. 거짓말처럼 ‘박근혜가 내려오니 세월호가 올라오고’ ‘박근혜가 구속되니 세월호가 돌아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수습을 위한 간절한 기다림이고 진실을 향한 치열한 투쟁이고 기억을 위한 진지한 걸음이었던 인양. 동거차도에서 세월호 가족들이 살아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동거차도의 시간

2017년 6월 30일 인양작업 감시단은 동거차도에서 철수했다. 꼭 한 번은 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인양 감시를 할 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어느새 그 섬을 잊고 있었다. 인양감시‧기록초소를 정리한다는 4.16가족협의회 공지를 보고서야 부랴부랴 쫓아가게 됐다. 세월호가 잠긴 바다 밑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알 길 없이, 망망한 바다에 떠 있는 크레인선을 하염없이 바라봐야 했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어디쯤에서 어떻게 지켜보고 기록하고 분노하고 다시 마음을 달랬을까? 시간은 흘러가버렸지만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라도 기억해두고 싶었다. 9월 1일 새벽 기차를 타고 팽목항으로 가니 승선 준비를 마친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한 아빠가 씁쓸하게 말했다. “요즘은 세월호 지우러 다니는 게 일이야.” 지금 내가 무엇을 하려고 온 것인지 분명해졌다.

섬에 닿고 짐을 부린 후 인양감시초소에 올랐다. 사진으로 볼 때 크레인선이 있던 자리에는 알아보기 쉽지 않은 작은 부표 하나가 겨우 남아있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동거차도 주민들이 모두 어선을 몰고 달려갔다는 자리. 그날의 상황을 떠올려보기에는 너무 고요해서 무서운 바다였다.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수백 번 넘게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멈춰버린 시간에 화가 나 울분을 터뜨렸을 것이다. 친구도 친척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이 함께 있어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족이 머물던 천막과 돔, 화장실 같은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지웠다. 흔적을. 깨끗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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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지운 자리

기억하기 위해 지운다는 게 가능할까? 천막을 덮었던 천과 비닐, 철골구조물, 합판과 각목 따위를 포대에 담거나 끈으로 묶어 산 아래로 옮겼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동안 잡생각은 사라졌지만 질문은 떠나지 않았다. 기억한다는 것. 무언가 현재진행형일 때는 다 기억할 수가 없다.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아직 다 알 수 없으므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자고 수백 번 다짐해도 아직 우리의 기억은 완성될 수 없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어쩌면 인양감시초소를 정리하면서 기억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누군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움을 삭혀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걸, 그리움과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눈물이 바다로 흘러내리던 장소가 있었다는 걸, 서로를 토닥이며 밤새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우리에게 기억이 숙제로 던져진 것은 아닐까?

둘째날 아침, 남은 짐들을 모두 산아래로 내려보내고 나니 산등성이 휑하게 벗겨진 자리가 더욱 선명했다. 여기에 다시 풀들이 자라 외로운 부표를 지켜주겠지만 그렇게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것이 모두 서운하고 속상했다. 내려가지 못하고 미적거리던 사람들이 노란리본 모양으로 돌무더기를 쌓기 시작했다. 우리의 표정은 조금씩 밝아졌고, 입을 열 수 없었던 무거운 침묵을 비집고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동거차도의 시간이 우리의 일상으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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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다시 이 자리를 찾아왔을 때 노란리본 돌무더기가 더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연결해주기를 빌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걸어온 길의 한자락에 이 자리가 있었다는 것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면 좋겠다. 우리의 길은 끝나지 않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