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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저녁'은 있으나 언제 저녁인지 선택할 수 없는 삶

[인권으로 읽는 세상]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은 노동자를 존중하고 있는가

"위를 바꿔도 안되는 걸."
 
올해 반월공단 최저임금 실태조사에 참여한 노동자가 던진 한마디였다.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의 슬로건은 노동존중이다. 소득주도성장론에 기반한 더불어 잘살기 위한 경제정책과 연계해 최저임금 1만 원, 노동 시간 단축,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을 꺼내들었다. 이전 이명박근혜 정부와는 완전히 결을 달리한 모습이다. 대통령이 바뀌니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는 기대와 평가 속에 출발한 노동정책이었다. 실제로 올해 최저임금은 2017년 대비 큰 폭으로 올랐다. 하지만 공단에서 만난 노동자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리 시원치 않았다. 왜일까?
 
공단 노동자들이 기대할 것 없는 노동정책 
 
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정책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었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에서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며 취임 첫날인 2017년 5월 12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대책을 발표했다. 상시·지속적 업무는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이후 정부의 일자리 플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일자리 정책 5년 로드맵 발표로 확인되었다. 이 의지는 민간 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롯데, SK브로드밴드 등 일부 대기업에서도 정규직 전환 계획을 밝히며 그 효과를 실감케 했다.
 
새 정부 출범부터 정부기관, 공기업 등이 정규직 전환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분위기와 달리 중소·영세 사업장이 몰려있는 공단은 잠잠했다. 수도권 공단 중에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반월공단에 입주한 업체당 평균 17명(2015년 기준)이 일한다. 일부 대기업과 대기업의 1차 하청 공장과 같은 대규모 공장을 제외하면 그 규모는 더욱 줄어든다. 이렇게 영세한 사업장이 몰려있는 공단에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일은 어떤 의미로 크게 어렵지 않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파견 업체를 통해 제조업 공장에 입사한다. 제조업은 원칙적으로 파견이 금지된 업종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사유를 들어 6개월까지만 일할 수 있다. 6개월 뒤에 회사에서 2년짜리 계약서를 내밀면 다시 계약직으로 하던 일을 이어간다. 2년이 지나고 나면 같은 업무와 노동조건으로 인해 자연스레 정규직이 된다. 문제는 정규직이 되어도 노동조건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정식으로 회사에 소속되기 때문에 잔업이나 특근 강요가 더 심해지고, 관리자의 사적인 업무처리를 요구받기도 한다. 형편이 이러니 공단 노동자들은 정규직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갇힌 비정규직 구조의 변화를 목표로 삼지 않고 고용 안정만을 강조할 때 공단의 노동자들은 기대할 것이 많지 않다. 
 
회사의 꼼수가 승인받는 과정 
 
장시간 노동의 대명사인 공단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주 52시간'의 대가로 탄력근무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공단은 이미 탄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원청의 물량 따라, 경기 상황에 따라 들쑥날쑥한 것이 공단의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이다. 공단에서 노동 상담을 할 때 빠지지 않고 휴업수당을 물어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량이 없다며 회사가 휴업하고 임금을 떼어먹다가 물량이 많을 때는 이유를 불문하고 잔업과 특근을 강제한다. 정부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회사 사정을 봐주겠다고 탄력근무제 확대를 들고 나왔는데, 공단에서는 오히려 불법적 탄력근무가 승인되고 노동시간은 그대로인 상황이 된 것이다. 법적으로 300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시간 단축은 몇 년 뒤로 미뤘고, 지난 7월부터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는 300인 이상 사업장은 고용노동부에서 당분간 처벌을 유예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평균 20명도 일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공단 노동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내건 정책은 노동자 스스로 저녁을 즐길 수 있는 날을 선택할 수 없는 처지만 확인시켜준 꼴이다.  
 
결정타는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정이었다. 노동자가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도 공단에서 노동을 이어가는 이유 중 하나는 상여금이다. 과거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상여금은 노동 운동이 임금인상 효과를 만들기 위해 합의한 고육지책이었다. 이후 중소기업의 임금수준 하락으로 공단의 기본급이 최저임금에 맞춰진 지금은 공단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노동자들은 그나마 상여금이 남아있는 공장을 찾아 일을 구하는데 국회는 상여금을 최저임금에 산입하는 법을 통과시켜버렸다. 상여금, 수당, 복리후생비 등 복잡한 임금체계가 문제라고 했지만, 공단 노동자들의 급여명세서는 포괄임금제로 단순해지는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상여금이라도 받던 노동자들이 아무런 보전도 받지 못하고 사실상 임금을 삭감당한 것이 '노동존중' 정책이었다. 공단 노동자의 반응이 싸늘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내어준 권리 
 
다 함께 잘사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동존중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나선 정부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정책을 집행할 땐 노동계와 경영계가 대립하는 문제의 중재자처럼 움직였다. 권리의 수호자가 아니라 협상의 중재자로 나선 정부는 정책을 '통 크게' 내놓았으니 회사 사정도 봐줘야 한다면서 노동자도 양보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 열악한 노동자의 권리를 내어줘버린 것이 지금의 정책이다. 공단 노동자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경영계와 거래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책으론 전체 노동자의 권리를 나아가게 만들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내어준 권리가 무엇이었는지 돌아봐야한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할 때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의 권리를 내어준 점은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해도 노동조합이 있다면 단체 협상을 통해서 회사와 직접 노동조건을 다툴 여지는 남아있다. 하지만 노조가 없는 회사의 노동자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해서 상여금을 삭감하겠다고 해도 대응할 제도적인 방법이 없다. 열 명 이상 일하는 회사는 일종의 사규에 해당하는 취업규칙을 노동부에 신고하고 회사 내에 공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꾸려면 노동자의 집단 논의 시간을 제공하고 과반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마저도 사장이 동의를 종용하기도 하지만 노동조합 없는 사업장에서 집단적인 입장을 모으기 위해 보장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셈이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에서는 상여금 삭감의 과정에서 이 절차를 무력화하는 입법을 강행했고 노조 없는 노동자가 항의할 기회조차 빼앗아버렸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정책의 시야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사업장은 작지만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500만 명 이상이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이 만들어지던 1953년부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권리는 제도의 사각지대였다. 영세사업장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의 중요한 항목인 연장, 야간, 휴일 수당이 제외되고, 연차 규정 제외되었다. 무엇보다 해고가 자유롭다. 
 
정부는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하며 5인 미만 사업장은 또 제외시켰다. 일주일은 7일이고 주말 노동도 연장 노동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300명, 50명, 30명 단위로 다른 시기에 적용받도록 만든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노동시간 단축을 기다릴 기회조차 봉쇄당했다. 모든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를 예외적 특권으로 만드는 것이 지금의 노동정책이다.  
 
노동존중을 실현하려면 
 
정책은 현실적 조건이나 정치적 타협에 따라 한걸음 나아가기도 하지만 주춤거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방향은 분명해야 정책의 실행 의지와 집행력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 최저임금 인상효과를 상쇄하기 위해 상여금을 삭감하는 꼼수는 최저임금이 결정된 전년도 9월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노동시간 단축이 국회 문턱을 넘기 전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은 법인을 둘로 나누는 꼼수를 부리기도 하고 인원 증원 없이 교대제를 도입해 52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도록 근무형태를 변경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와 20대 국회가 자랑 삼는 노동정책은 현장에서 횡행하던 꼼수에 날개만 달아준 셈이었다. 이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기대보다, 결국 물러설 것이라는 회의와 우려는 스스로 만든 것이다. 
 
노동자가 회사와 계약을 맺을 때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국가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 노동정책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회사가 어렵고, 경제가 흔들려도 노동자의 삶은 흔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정책이다. 일부 관료는 정부가 힘있게 정책을 펼 수 없도록 노동계가 협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가 일하는 사람의 현실을 살핀다면 지금의 비판들을 '이기주의'로 치부해선 안 된다. 노동정책의 방향과 성격을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한다는 신호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