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후원인 인터뷰

“인권운동 현장의 언어를 만들어준 사랑방에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정은주 님을 만났어요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어느 희뿌연 저녁, 광화문의 한 돼지국밥집에서 후원인 정은주 님을 만났습니다. 인권 현장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이번 인터뷰는 마치 그의 인권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에 초대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밀도있는 삶의 이야기를 나눠 주셔서 감사드려요. 

 

 

◇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정은주죠. 인권활동을 하는 친구들은 별명이 있거나, 자기소개에 분명한 색깔이 있던데, 저는 항상 제 이름이 정은주니까 정은주로 소개했던 것 같아요. 딱히 더 붙일게 없어요. (웃음)

  

◇ 인권운동사랑방과의 인연은?

  

사랑방을 알고 지낸지는 오래되었어요. 대학 다닐 때도 친구들 사이에서 (소위) 유명한 단체였으니까요. 정작 후원은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웃음) 인권운동사랑방과의 직접적인 인연은 2016년 인권활동가대회 준비팀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사랑방 활동가들을 비롯해 여러 인권활동가들을 알게 되었어요. 당시 저는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할 때였는데, 인권운동사랑방에 대한 일종의 선망이 있었던 거 같아요. 현장단체에 대한 선망과 같은 거죠. 재단이라는 ‘현장단체’라고 말하기 어려운 곳에서 일하면서 인권활동가대회 준비팀을 해보자 한 것은 현장과 비현장 사이의 경계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인권의 현장이라는 게 다양하고, 가령 제도를 만드는 일도 인권현장이 될 수 있데, 당시 저는 주변 사람들이 경찰선 앞에서 싸우는 것만이 인권 현장이라고 생각할 거라 미리 단정하고, 자기가 만든 시선 갇혀 떳떳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웃음)

  

◇ 인권에 접속하게 된 계기는?

  

대학 때 노동운동 동아리하면서 이랜드·홈에버, 기륭전자, 한미 FTA 투쟁 단위에 연대했었어요.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한창 할 때, 한번은 홈에버 마트를 점거한 적이 있었죠. 점주들 입장에서는 당사자도 아닌 대학생들이 셔터문 내리고 행패를 부리니까, 멱살잡이 하면서 싸운 적이 있었죠. 그때 처음 ‘내가 당사자도 아닌데, 왜 거기 있었지?’라는 질문이 생겼고, ‘나는 왜 모두가 소고기 촛불집회에서 이명박 하야를 외칠 때 왜 노동자들의 이슈에 관심을 가졌을까?’, ‘왜 소고기 촛불집회 가는 사람들은 노동자 투쟁에는 연대하지 않지?’, ‘연대하지 않는 혹은 자기 일이 아닌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떤 근거가 필요하지?’ 라는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당시 제 논리는 자본과 노동자, 그 착취 관계를 규명하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는데 (깔때기 론이죠, 하하), 그 렌즈만으로 풀리지 않던 것이 있었던 거죠.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엄마는 ‘네 문제도 아닌데 왜 거기 가 있냐, 네 인권이나 챙겨라’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엄마를 설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던 거죠. 고민이 구조적인 문제에서 실존적인 문제로 옮아왔던 시기였어요.

  

인권이라는 단어를 직접 마주한 때는 대학 4학년 때였어요. 2009년에 처음 제가 다닌 학교에 <인권의 사회학>이라는 과목이 막 개설 되었어요. 그전에는 프랑스혁명이니 자유권이니 할 때 언뜻 들었던 게 다였죠. 제가 맑스주의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당시만 해도 인권이 굉장히 나이브한 주제로 인식되는 구도가 있었어요. 물론 아무도 대놓고 인권 개념은 나이브하다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요. (웃음) 촛불집회에서 새로운 주체들이 나타나고 시민 지형이 바뀌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 체제로만 현장을 분석하기 어려워진다는 인상을 받았죠. 세상은 하나의 이념으로만 구성되는 구도가 아니라, 다양한 견해들 속에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존재하고 이를 인권의 언어와 규범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민하게 되었어요. 노동이슈가 다국적 기업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도 없고,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어쩌면 그 다양한 이슈들은 ‘인권이라는 단어로 해석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는 기점이 됐어요.

  

◇ 대학생 때부터 노동 투쟁 현장에도 연대하시고 소위 ‘현장’에 대한 선망도 있었는데,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궁금해요.

  

대학생활에서부터 사회단체를 미리 경험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이들이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었어요. 제가 맑스주의 철학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막상 노동단체의 운동방식이 저한테는 안 어울렸어요. 투쟁가를 부르면 눈물도 나고 기륭투쟁에 같이 있으면 벅찬데, 소화기를 뿌려대는 투쟁 현장에 가면 저는 선배들이 늘 챙겨줘야 하는 ‘나약한’ 후배 같은 존재였죠. (웃음) 과거에 “깔린 경험” 때문에 폐쇄공포증도 생겼어요. 그런데 선배들을 따라가면 늘 깔리는 데만 가는 거에요. (웃음) 그러다가 졸업 후 한 단체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는데, 너무 ‘꼰대’스러운 곳이어서 하루만에 그만두고 다시 가게 된 곳이 중간지원 조직이었죠. 거기서 4년 8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웃음)

  

◇ 그 곳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당시 중점 의제로 도시와 인권, 개발과 인권, 기업과 인권을 다루고 있었어요. 저는 학교 다닐 때 노동자와 연대하는 운동을 많이 했으니까 자연스레 기업의 인권침해에 대해 관심이 있었지만, 제가 이슈를 선점하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재단에서 업무를 배정하는데 ‘너 사회학과 졸업했으니까 기업과 인권 해볼래?’ 라고 제안을 해왔어요. 사회학이 어떤 의제와도 엮을 수 있는 측면이 있잖아요. (웃음) 어떤 일인가 들여다봤죠. 맑스주의를 조금이나마 공부한 저에게 기업의 인권책임은 너무 당연한 거였는데, 막상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제 논의라는 게 몇 십년동안 연구만 하고 있는 상황인거죠. 그때부터 내내 기업과 인권 관련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관련 연구 프로젝트 등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제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편인 거 같아요. 재단에서 일하면서 인권활동가들을 동경하는 한편 또 재단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살았는데요. 인권재단에서 일하면서도 하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엄격한 잣대로 스스로를 압박했던 거 같아요. 예컨대 정부 재원으로 용역보고서를 내게 되면 보고서 내용이 너무 관(官)스러운 거 아니야? 라고 묻게 되는 거죠. 아무도 제 일을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고, 과연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일까 라는 질문을 반복하다가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어요. 재단에서 쌓은 경험에 보다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싶다는 갈증도 있었어요. 존중, 보호, 실현이라는 각각의 단어가 어떻게 다른지, 단어의 뿌리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죠. 그리고 한번 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 저처럼 탈조선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유학이란 건 달콤한 꿈처럼 느껴지거든요. 외국에서 산 시간은 어땠나요?

  

놀았죠, 뭐. (웃음) 인권활동가들 중에 낮은 활동비를 받으며 저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어요. 저는 재단에서 일한 덕분에 조금이나마 급여가 높았죠. 그렇게 모은 돈 다 쓰고 오자는 마음으로 유학을 떠났죠. 실제로 유학을 다녀온 뒤 통장 잔고가 0원이었어요. 제가 선택한 대학은 유럽연합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곳이라, 비교적 학비가 쌌고, 급식비, 책값이 좀 나왔어요. 유학을 가자 마음을 먹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입시 원서를 접수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학이었죠.

  

◇ 석사 논문은 무엇에 관한 건가요?

  

기업과 인권이 주제에요. 매번 유엔이 초국적 기업을 규제하기 위한 국제규범을 만드는데 실패해 왔는데, 2011년 드디어 기업과 인권에 관한 유엔 원칙이 채택되죠. 어떻게 보면 기업의 해외 활동을 직접 규제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점에서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가장 발전된 원칙이라고도 해요. 이 원칙에서는 기업이 인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기업의 인권 영향평가 수행을 요청하게 되는데요, 일종의 제도적 권고인 셈이에요. 기업의 이런 노력이 기업의 경영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접근 방식이죠. 그런데 최근 라오스 댐 사고의 경우도, 환경 영향평가를 안 해서 생긴 사고는 아니거든요. 기업의 인권침해를 막는 규범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 싶었어요. 기업의 자구책에 대한 현황 조사를 통해 제 석사논문이 결국 주장하는 바는 국내와 국제, 그리고 사법과 비사법적인 노력이 동시에 동반되어야지 기업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인권침해를 막을 수 있다는 거예요. 결국 기업의 인권존중 책임 유형을 견인할 국가의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입니다.

  

◇ 요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요즘 국제개발 관련 공공기관에서 이제 막 일을 시작하고 있어요. 제가 하는 일은 쉽게 말하면 기관이 인권 경영의 일환으로 조직 내와 사업 현장에서의 인권침해 진정 제도를 만들도록 하는 일입니다. 인권위는 인권침해를 하는 기업에 대해 차별 시정 등에 관한 권고를 못 내려요. 비록 기업의 인권침해가 광범위하고 사회에 걸쳐있어도 민간 기업이니까요. 이른바 제도의 공백이 발생하게 되는 거죠. 제가 일하는 개발협력 기관은 장기적으로 자체적인 진정 제도를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그게 유엔의 규범이기도 하죠. 아시아개발은행이나 세계은행, 심지어 일본 원조기관에도 내부 진정 제도를 갖추고 있어요. 저의 과제로는 일단 내부 직원의 신뢰를 얻으면서 가야 할 거 같아요. 대외적으로는 인권침해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의무부담자이지만, 실제 내부 직원들의 인권도 잘 보호되고 있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거든요. 저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배경을 가지고 이 일을 하기 위해 잠깐 와 있지만, 저의 이해관계와 공공기관 내부 직원의 고충과 위치, 원조를 받고 있는 국가의 현지 주민들의 인권까지 고려해야 하니까, 마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기분입니다. (웃음) 사업을 인권적으로 수행하면서 원조를 받는 나라의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는가와, 기업경영에 인권의 가치를 녹이는 작업. 이렇게 두 가지 이행계획을 세우는 게 제 일인데.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죠.

  

◇ 은주님은 자신의 일에 대해 대단히 열정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소모된 에너지는 무엇으로 채우세요?

  

고민의식이 느껴지는 생생한 문장들을 읽으면 힐링이 되는 거 같아요. 최근에는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발간한 「인권교육 새로고침」을 읽고 있는데, 되게 뭉클했어요. 그 외에 크게 노력하는 건 없고, 술 마시거나 누워있거나 친구들과 수다 떨어요. (웃음) 점점 일적인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는 느낌이라 외톨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죠.

  

◇ 혹시 너무 외로우시면, 인권운동사랑방 자원활동을 권하고 싶어요. 자원활동을 삼 개월 하시면 상임활동가 지원도 가능하답니다.(하하) 마지막으로 인권운동사랑방에 한마디?

  

2016년 인권운동사랑방도 참여했던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 운동이 한창일 때, 3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원탁토론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가장 인권의 언어가 절실할 때, 마치 외로울 때 뭐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처럼,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고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언어가 갈급할 때, 인권운동 현장의 언어를 만들어줬던 곳이라 감사함을 느껴요. 제가 참조를 많이 하는 발전권 선언 번역본도 이미 2000년 초반에 사랑방이 번역해 놨더라고요. 현장에서 어떤 고민을 하는지 그 흔적과 뿌리를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찾을 때가 많았어요. 좋은 의미로 ‘전통적’인 인권의 언어를 찾아주고, 현장 목소리에 기반한 인권옹호활동을 하는 조직의 힘에 존경을 보냅니다. 사랑방을 떠올리면 그런 몽글몽글한 느낌과 동시에 감사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