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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평등으로 길을 내자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연속토론회 <문제적 인권, 운동의 문제> ‘2차 토론회 : 평등은 평등으로 가고 있는가(8.30)’후기

“모든 사람은 존엄하며, 자유롭고 평등하다.” 올해 70주년을 맞는 세계인권선언은 ‘평등’을 인권의 핵심 가치 중 하나로 제시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심각한 불평등이 전지구적 의제가 된 지도 오래다. ‘촛불항쟁’을 거친 한국사회에도 평등을 향한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평등을 향한 열망은 제 길을 찾고 있을까? 평등은 평등으로 가고 있는가 질문을 던지게 하는 풍경들을 마주하며 연속토론회 <문제적 인권, 운동의 문제> 두 번째 토론을 준비했다.

 

복잡한 풍경들

 

‘비정규직 철폐’라는 오랜 구호가 문재인 정부에서 메아리를 만난 듯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같은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화하겠다는 계획도 좌초했다. 공정하지 않다는 여론에 밀린 것이다.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 역시 공정함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에 파묻혀 길을 잃었다. 개인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여 그것에 부합하는 대우를 하는 것이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로 여겨지는 듯하다.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감각은 분명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기회의 평등’에 갇혀버린 공정함은 결과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면서 누군가의 권리를 제한하는 목소리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임승차 논리는 ‘역차별’이라는 주장과 함께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휩쓸려가기도 한다.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주장과 함께 무슬림/난민에 대한 혐오가 거세게 등장한 최근의 상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더욱 복잡한 풍경도 펼쳐진다. 여성혐오와 성차별에 맞서 ‘불법 몰카 근절’을 주장하며 운집한 여성들의 목소리에 또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뒤섞이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사회에는 ‘혐오’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혐오의 시대적 배경에 경제적 불평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전지구적으로 인종주의를 앞세운 극우정치세력이 급성장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 있다.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또 다른 불평등을 조장하고 서로 맞물리며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지금 여기에서 평등으로 한걸음 더 내딛기 위해 인권운동은 어떤 길을 열어야 할까? 기초발제에 이은 세 명의 심화발제는 실마리를 건네주었다.

 

평등이 평등으로 가게, 길을 내야 할 때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활동가 공현은 능력주의의 문제를 짚어주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인정 시스템”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능력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거꾸로다. 보상과 인정의 불평등한 분배를 ‘능력이 부족한 탓’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공현은 능력주의가 평등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능력주의는 애초에 기회의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선별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흔히 ‘같은 출발선’에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이뤄진 경주의 결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이 경주나 시합일까? 평가하는 권력을 직시하며 경주 바깥의 세계관을 제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활동가 김혜진은 KTX 승무원들의 정규직 채용 합의에 대한 비난 댓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인의 행복을 시기하는 것이라고만 보기에 이미 노동시장은 ‘직무’를 기준으로 철저히 위계화되어 있고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와 기업은 이런 차별을 ‘사회적 신분’으로까지 만들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볼멘소리를 이기적인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의 하락을 막기 위해 모두가 몸부림쳐야 하는 구조적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김혜진은 최근의 노동조합 운동이 조합원의 위계를 지키는 운동이 되어 보편적 권리의 기반을 만드는 운동이 되지 못하는 씁쓸한 현실도 짚어주었다. 지금이야말로 “더 크게 질문하고 더 크게 싸워 왜곡된 신자유주의적 인식에 균열을 내야 할 때”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 나영은 안희정 1심 판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오히려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불평등한 구조의 문제가 만들어낸 결과를 오히려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기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스펙 경쟁에서 쳇바퀴를 아무리 굴려도 그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이들이 스스로를 ‘피해자’, ‘약자’로 정체화하기 시작”하면서 경주에 뛰어든 여성, 이주민 등을 탓하는 현상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구조적 불평등에 맞서기 위한 공동의 문제설정과 공동의 대응이 시급해지고 있다.

 

운동이 내야 할 길

 

토론회 참여자들의 지정토론을 시작으로 이어진 종합토론에서 평등으로 길을 낼 고민들이 더욱 깊어졌다. 공정함에 대한 집착은 능력주의로 이어져 개인의 무권리 상태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비판만으로 방향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유행어가 되어버린 ‘흙수저’에서도 드러나듯 사람들은 이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운동이 공정한 기회를 확대하는 것 이상을 제시할 전망이 없다는 점이야말로 시급한 과제는 아닐까? 공정성이 “각자의 정당한 몫을 납득 가능한 수준에서 배분하는 것에 연결된 감각”이라면(날맹), 문제는 분배 정책이나 기술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공동체다.

구조적 불평등에 맞서 길을 내려면 정책에 앞서 ‘정치’를 모색해야 한다. 불평등에 분노하는 사람들을 집합적 주체로 구성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자조 섞인 ‘흙수저’로는 집합적 주체가 구성되기 어렵다. 남성과 여성, 국민과 이주민,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사회가 구분한 자리에 붙들려 타 집단에 대한 배타성으로 단결을 꾀하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반차별의 시선으로 계급적 조건을 분석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인권의 주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 탐색해야 한다.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고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능력 없어서 그런 것’으로 치부될 때, ‘그건 너의 책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관계 맺기가 저항의 시작일 수 있다.

토론을 하면서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모두가 개인의 책임을 추궁당할 때 ‘니가 그 집단/정체성이라서 그렇다’는 비난까지 덧대는 것이 차별이다. 차별하면 안 된다는 말은 도덕의 언어에 그칠 수 없다. 불평등의 조건을 함께 겪으면서도 서로 적대하는 집단이 되어 저항의 에너지를 소진시킬 때, 평등에 대한 감각을 재건하면서 서로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관계 맺기가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가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혐오가 민주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대에 평등을 향한 멈추지 않는 도전이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함께 새로운 지형을

 

평등과 공정함은 분명히 다르다. 평등은 존엄에 관한 문제라면 공정은 평가에 관한 문제다. 평등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공정은 당신이 승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능력 있는 개인’이 주체성의 요건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역량이야말로 우리가 꾀해야 할 과제다. “나 능력 없다, 그러나 나 존엄하다.”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인권의 조직과 장소를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인권운동의 과제가 아닐까.

비판이 운동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 길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인들 다른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흐름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토론을 하면서 아주 구체적인 과제까지 도출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운동에서 맞부닥뜨린 고민들을 나누면서 더욱 너른 시야에서 지형을 살필 수 있었던 만큼, 조금 헤매더라도 우리가 함께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즐거운 토론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경제적 평등’과 ‘인격의 평등’이 교차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되 서로 다른 두 지평을 무작정 섞어서는 안 된다는 우려, 능력주의와 효율성에 매달리게 되는 조건을 무시한 채 말하는 ‘존엄’이 공허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고백을 기억하려고 한다. 잠시 멈추기도 하고 곁눈질도 하면서, 가볼 만한 길이라는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