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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가난한 무주택자가 주택시장의 잠재적 수요자?

[인권으로 읽는 세상] 8.2 대책이 와닿지 않는 이유

나는 한 번도 집을 사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워낙 가난해서 집을 살 엄두를 못 내기도 했고, 혼자 사는데 굳이 집을 살 필요가 있나 싶었다. 반면 자녀가 있는 오빠나 언니, 동생은 모두 집을 샀다. 엄청난 은행 대출을 받아서 꼬박꼬박 이자 갚느라 고생하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왜 고생스럽게 집을 사냐"고. 그러자 하나같이 "애들 키우는데 매번 이사를 가는 게 힘들어서"라고 답했다. 전학 등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덜 미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껑충 뛴 전세값 채우느라 전전긍긍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만약 우리나라가 전세든 월세든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사회라면 우리 가족들은 굳이 집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집 투기 억제대책

지난 2일 국토교통부는 '실수요 보호와 단기 투기수요 억제를 위한 주택시장 안정화 방안'(이하 8.2 대책)을 발표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투기과열지구를 지정했고,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세를 강화하고, 재건축 시 초과이익 환수제를 시행하겠다고 했다. 또한 청약제도를 실제 거주할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편하고, 투기지역에서는 주택담보대출도 가구당 1건으로 제한하고, 주택담보대출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 한도도 각각 60%와 50%에서 40%로 일괄 하향 조정하기로 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이 "정부는 집을 거주공간이 아니라 투기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처럼, 투기를 억제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인다. 투기로 집값이 뛰어 집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집값 상승을 막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정부의 주요 역할이다. 이번 대책이 효과가 있길 바라는 무주택 서민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8.2 대책이 내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

그런데 8.2 대책은 내 삶과 무관하게 여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집을 살 수 있는 형편도 안 되고, 집을 살 의지도 없다. 8.2 대책은 집을 구매해서 안정된 주거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집을 소유할 수 없는 사람들, 즉 실수요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대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택시장 안정화방안'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주택문제를 푸는 일도 주택시장에 붙들려있다.

주거권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유엔 경제적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약칭 사회권규약)'에도 명시된 인권이다. 유엔사회권위원회가 1991년 발표한 '적절한 주거의 권리에 관한 일반논평'에서 주거권은 물리적인 주거만이 아니라 안전하고, 평화롭고, 존엄하게 살 권리를 포함한다. 그중에서도 삶의 안정성을 보장할 점유의 안정성은 매우 중요하다. 쫓겨날 걱정 없이 거주할 수 있어야 일상도 평안하고 미래 계획도 세울 수 있다. 2013년 주거권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도 주거권에서 '점유의 안정성'을 주요하게 뽑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나라에서 점유의 안정성은 집을 소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소유와 거주가 일치하든 그렇지 않든 소유를 중심으로 주택정책에 접근하는 순간, 집은 거래, 즉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013년 주거권특별보고관은 '점유의 안정성에 관한 보고서'에서 점유의 안정성을 소유권제도에서 인권적 틀에 근거한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자고 했다. 자가 소유라는 점유형태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점유를 사고할 때 점유의 안정성을 현실적으로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임대인과 임차인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소유권과 점유권의 갈등에서 국가가 점유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주택시장 안정화를 넘어 주거안정성 확대로

그런 점에서 이번 대책에서 전·월세 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을 도입 등의 세입자 권리를 보장하는 안이 빠진 것은 아쉽다. 한국도시연구소와 주거권네트워크가 통계청 가계동향조사를 분석해 낸 '박근혜 정부 주거비 상승과 소득 정체에 대한 실증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기준 2인 이상 가구의 가처분소득 대비 주거비 부담 비율(RIR)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10%대에서 21.8%로 올라 주거부담이 커졌다. 서울에 사는 소득하위 20%에 해당하는 청년의 월 소득 대비 주거비 부담은 55.8%나 된다(2010년 서울시 실태조사 결과). 전세보증금과 월세에 소득의 대부분을 쏟아야하는 사람들에게 '집을 사라'고 권유하는 정책은 남의 다리 긁는 일이다.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전제에 기초한 주택정책을 지향한다면, '주택시장의 수요자'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더 마련해야한다. 다시 말해 정부가 무주택자를 주택시장의 잠재적 수요자, 구매자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할 때 점유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혁신적인 주택정책을 마련할 수 있다. '주택시장'의 공급과 수요가 아니라 '거주의 안정성이 필요한 사람들(수요)'와 그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주택정책(공급)'으로 접근해야 한다. 안정적인 거주를 바라는 사람들 모두가 집을 구매하기 원하는 건 아니다. 집세 걱정으로 주거불안정에 시달리는 세입자들을 위한 주거정책이 필요하다. 인구구성이나 가구구성이 과거와 달라진 지금, 정부의 역할은 다양한 형태의 공공주택이나 임대정책을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내 바람도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 보증금 인상에 시달리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다. 주택청약에 가입한지 15년이나 됐지만 공공임대주택에 신청해도 번번이 떨어질 만큼 임대주택은 매우 적다. 새 정부가 임대주택 공급을 이전에 비해 늘렸다지만 절반에 가까운 무주택자 비율을 생각하면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 그 어느 때보다 공공임대주택의 파격적인 확대나 세입자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임대정책이 필요한 시기다.

다양한 공공주택이나 임대정책으로 점유(거주)의 안정성이 확보된다면 주택소유 욕구가 줄어들어 집은 투기상품이 아닌 주거수단이 될 것이다. 아무리 주택공급을 늘려도 집이 투기 대상이 되는 이유는 지금까지 주택정책이 집거래(소유)를 중심으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높은 집값과 낮은 소득으로 인해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돼 있다.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집을 사는 것'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저금리와 경기침체로 인해 돈을 불릴 곳을 찾는 자본이 부동산에 몰리고 있다. 공장을 운영해 버는 돈보다 집을 사고 팔아 버는 돈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을 몇 채씩 사봤자 살 사람이 없다면, 안정적인 거주를 위해서 굳이 집을 사지 않아도 되는 주거정책이 보편화된다면, 정부가 말하듯이 집은 '투기수단의 용도'에서 폐기될 것이다.

이제 소유의 안정성보다는 점유의 안정성(주거안정성)을 높이는 주택정책으로 인간 존엄과 삶의 질을 높였으면 좋겠다. 이사 걱정 없이 현재를 즐기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